조민진 작가.
조민진 작가.

슈퍼에서 길고 통통한 분홍색 소시지를 보면 반가운 마음에 괜히 집어 든다. 옛날 소시지, 추억의 소시지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계란에 부쳐줬던 소시지. 종종 들르는 드러그스토어에서 파는 몇천원짜리 크림은 향기가 진짜 좋다. 동글납작한 파란색 철제통에 담긴 크림에서 나는 특유의 향은 어릴 때 맡았던 향이다. 네모난 책가방 메고 학교 다닐 때가 생각난다. 지금도 옆에 두고 손에 바르는데 포근함이 느껴진다. 대학 때 썼던 저렴한 향수는 잊을 만하면 다시 찾게 된다. 더 비싼 향수에서도 맡을 수 없는 순수한 향취를 풍긴다. 처음 본 후로 20~30년쯤 훌쩍 지난 드라마와 영화를 오랜만에 보면 타임머신이라도 탄 기분이다. 거기 나오는 음악들은 그때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지금도 듣곤 한다. 아직 가보지 못한 여행지들이 무수히 많지만 웬일인지 그때 갔던 곳에 다시 가고 싶다. 통영 비진도나 미국 뉴올리언스는 기억 속에서도 아득한 저 편에 있지만 미화됐을지언정 퇴색되진 않았다. 틈틈이 떠오르면 더 아름답게 덧칠한다.

요즘 내가 진행하는 에세이 수업 과제로 수강생이 제출한 글을 읽다가 결국 시집을 뒤적였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유치환이 쓴 '깃발'을 외우던 아버지에 관한 얘기였는데 나는 그 옛날 국어시간과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읽으면서 추억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기억이 추억이 되면 향수를 동반한다. 노스탤지어,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추억에 관한 모든 것'이란 책에서 저자 다니엘 레티히는 19세기 이후 사람들이 느끼는 향수란 "어떤 장소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동경"이라고 했다. 기술이 진보하고 이동수단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돌아갈 수 없는 장소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면 시간은 여전히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그곳이라기보다는 그때를 그리워한다. 오늘도 그곳에 갈 순 있지만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나는 그때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 해도 그럴 생각이 없다. 살아온 날들이 더해져 만들어진 오늘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추억이 오늘을 고양시키고 있음을 체득한다. 추억은 미화돼 있다. 심리적 면역계가 그렇게 작동한다고 한다. 추억에 관한 책에선 "뇌는 부정적 경험을 더 빨리 잊고 긍정적 경험은 더 오래 보존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뇌가 우리의 정신 건강을 돕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추억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오늘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달래 준다.

옛 시집을 보며 추억에 젖는다. 추억은 별 하나에 걸려 있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가끔씩 밤하늘을 지키고 있는 별을 본다. 별은 "반짝 반짝 작은 별"이다. 그 시절 노래했던 '작은 별'은 모차르트가 프랑스 민요를 듣고 만든 피아노 변주곡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추억을 트는 건 오늘을 위해서다. 내일을 위해 오늘도 추억을 만들자.


조민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