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0년 4월19일 민주주의를 차지하기 위한 10만명 이상의 학생·시민 등의 시위대가 길거리로 뛰쳐나와 혁명을 일으켰다. 사진은 이날 서울 동성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플랜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모습. /사진=(사)3·15의거기념사업회
지난 1960년 4월19일 민주주의를 차지하기 위한 10만명 이상의 학생·시민 등의 시위대가 길거리로 뛰쳐나와 혁명을 일으켰다. 사진은 이날 서울 동성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플랜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모습. /사진=(사)3·15의거기념사업회

1960년 4월19일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10만명 이상의 시위대가 민주주의 혁명을 일으켰다.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가 판을 친 1960년 3월15일. 이승만 대통령은 4번째 집권에 도전하기 위해 선거 과정에서 '피아노표' '쌍가락지표' '올빼미 개표' 등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같은날 오후 3시42분 3000명이 넘는 시민들은 부정 선거를 인정할 수 없다며 거리로 뛰쳐나와 제1차 마산 의거를 벌였다. 그럼에도 부정 개표는 계속됐고 시민들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하면서 시민 9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4월11일 마산 한 바닷가에 최루탄에 눈을 맞고 세상을 떠난 16세 김주열군의 시신이 떠올랐다. 김주열군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한 후 행방불명됐다. 실종된 지 27일 만에 마산 중앙부두에서 발견됐는데 이 사건이 제2차 마산 의거의 도화산이 됐다.

김주열군 시신의 모습은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전국으로 퍼졌다. 소식을 접한 3000여명의 마산 시민은 시신이 안치된 도립마산병원(현 경남마산의료원)으로 몰려들었다. 시신의 참혹한 모습을 목격한 시민들은 이번 선거는 부정선거를 넘는 '살인선거'라며 격분했다.


시민들은 김주열군의 시신을 본 후 울분을 토했다. 특히 마산고-마산상고-마산여고 등에 재학 중이던 김주열군 또래 학생들은 교문 밖으로 나가 마산 시내를 가득 메웠다. 이후 학생들을 비롯한 중·장년층부터 거동이 불편한 노년층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괴한 습격받은 고려대 학생들…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바닷가에 떠오르면서 시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4월19일 서울 강북구 김주열 열사 묘비에 국화가 놓인 모습. /사진=뉴스1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바닷가에 떠오르면서 시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4월19일 서울 강북구 김주열 열사 묘비에 국화가 놓인 모습. /사진=뉴스1

"죽은 자식 살려내라!" "차라리 우리도 죽여라!"

학생들은 절규했다. 시민들은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냈고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이날 오후 6시쯤 3만여명의 시민이 마산시청과 경찰서, 파출소 등을 습격했다. 밤 9시30분 경찰이 쏜 총에 맞은 한 명의 시민이 세상을 떠났다. 이 항쟁에서 12명이 사망하고 250여명이 경찰에 쏜 총에 맞거나 체포 구금됐다.

마산 시민은 더욱 봉기했고 경찰과 공방전을 벌였다. 시위는 이날부터 13일까지 3일 동안 이어졌다. 해인대(현 경남대) 재학생 수천명이 합류한 시위대는 부정선거와 정부를 규탄했다.

점차 시위는 서울 소재 대학으로 상륙했다. 4월16일 고려대 총학생회는 신입생 환영회 행사를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모인 틈을 타 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학내 상주하던 경찰들이 이를 눈치채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총학생회는 시위를 잠시 미뤘다.

4월18일 오전 10시50분 고려대 학생 3000여명은 '민주역적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워 본관 앞에서 태평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본관) 앞까지 전진했다. 그렇게 시위는 저녁까지 이어졌고 학생들은 집회를 해산하고 복귀할 예정이었다.

이때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 학생들은 청계 4가에서 정체불명 괴한들에게 습격받았고 수십명의 학생이 구타당했다. 학생들은 상처를 입은 채 길바닥에서 나뒹굴었다. 다음날 학생들의 사진이 조간신문을 통해 공개되자 전국의 학생들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서울 소재 대학 연합의 거사일로 예정된 21일 시위는 19일로 앞당겨졌다. 4월19일 오전 9시쯤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 시위대에 중·고등학생들이 대대적으로 합류했다. 연세대와 고려대, 성균관대, 한국외대, 중앙대, 건국대, 동국대 등 대학생 수천명이 합류한 시위대는 서울에서만 어느덧 10만명을 넘겼고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메웠다.

학생들은 국회의사당을 향해 진격했다. 오후 1시30분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발포를 시작했다. 이날 서울에서만 104명이 사망할 정도로 피해가 컸던 탓에 '피의 화요일'로 불렸다. 시민들은 시위대를 향해 맞서 싸웠다. 끊임없이 경무대와 중앙청 등으로부터 맞섰고 시위대에 수혈할 피가 부족하자 헌혈을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하야한 이승만… 한국 최초 민주주의 혁명의 시작

4·19 혁명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기록됐다. 사진은 지난 2022년 4월19일 서울 강북구 우아동 국립 4·19 민주묘지에서 열린 4·19 혁명 기념식 기념탑. /사진=뉴스1
4·19 혁명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기록됐다. 사진은 지난 2022년 4월19일 서울 강북구 우아동 국립 4·19 민주묘지에서 열린 4·19 혁명 기념식 기념탑. /사진=뉴스1

"난동으로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생애를 바친 애국적인 한국민이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고 믿지 못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시민들의 분노에도 착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4월20일 이같은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면서 유감을 표했을 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미국마저 이승만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유럽 등 해외 언론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부정적인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4월25일 시위는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서울 소재 대학 교수단은 민주주의를 향해 두려움없이 나선 제자들이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행진을 시작했다. 258명이 모인 교수단 전원은 시국 선언문에 서명을 마친 후 일사천리로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식자층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시기에 발생한 만큼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는 것이다.

서울 시내를 행진하던 교수들의 뒤에 시민·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통금 사이렌마저 무시한 채 시위를 지속했다. 심지어 19일 수송국민학교에 재학하던 전한승군(13세)이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국민학생(현 초등학생)들까지 시위 군중에 합류했다. 어린아이들마저 합류한 시위대는 10만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4월26일 오전 9시45분 파고다공원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이 쓰러졌다. 오전 10시20분 이승만 대통령은 마침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다.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 대통령을 추종하던 이들은 하염없이 무너졌다. 대한민국 최초 민주주의 혁명인 4·19 혁명은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았다.